낡은 청실을 보며...
- SANGEUN
- May 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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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인지 2010년도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하여간 성인이 되어 찾아간 청실은 2004년도의 청실아파트와 흡사했지만 훨씬 낡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2002년에도 이미 10년은 훨씬 넘은 연식의 건물이긴 했죠.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미 재건축이 확정된 상태였고, 그 때문인지 외부 도장을 몇 년 동안이나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벽에는 금이 가 있었고, 동을 나타내는 파란 숫자도 빛이 상당히 바래어 있더라고요. 낡아 보일 만도 했습니다. 아직 주민들이 거주 중이기는 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연락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고, 또 몇몇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상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공간은 공간 자체만이 아니라 시간 또한 부여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청실아파트는 여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많은 게 변했고, 그 때문에 어린 시절처럼 <내 집>이라는 생각을 갖기 힘들더라고요. 청실은 이전에 제가 알던 청실이 아니라는 게 많이 슬펐습니다. 나쁜 기억도 있고, 좋은 추억도 있고, 저한테 큰 성장의 계기가 된 공간이었거든요.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특별히 많은 정을 갖고 있었던 동네가 낡아서 곧 허물어질 거라는 사실이 안타깝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방문한 건 2012년인가 2011년이었는데, 그때 청실은 허물기 직전이라서 주민들도 전부 나간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주차금지 표시라던가, 벽보라던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는 물건들도 전부 치운 상태여서 그냥 폐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놀이터였습니다. 15동 앞에는 초록색으로 칠해놓은 그네나 시소 같은 놀이시설이 있었습니다. 2002년에도 녹슬고 낡은 상태여서 그 기구를 갖고 노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가끔씩 거기에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끔씩이라도 사람의 손을 타는 기구들은 안 쓰는 기구들과는 차이가 나기도 했고요. 그런데 2012년의 놀이기구들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초록색이라거나, 녹슨 상태도 똑같았는데 이젠 정말로 버려져서 두 번 다시 쓸 일이 없을 기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30분 정도였나? 1동에서 15동까지 천천히 돌았는데,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로 하나도 없더라고요. 화단에 있었던 식물들도 다 말라 죽었거나 뽑아갔거나 한 상태였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남서울상가나 청실상가가 있고, 거기에서는 상인이나 학생들도 있는데, 고작 그 경계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차이 날 줄은 몰랐습니다.
연구자 분께서 며칠 전에 제 트윗을 리트윗하셨죠? <지금은 청실아파트 다 사라지고 래미안인지 데시앙인지 들어섰는데 내가 거기서 살았다는 물리적 증거도 다 사라지고 남은 증거라고는 내 기억밖에 없네ㅇㅅㅇ;>라고 썼던 글인데, 그 때 느낀 심정은 정말 그 글 그대로였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국보나 사적이 아닌 이상, 모든 건물들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 해서 허물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건물들은 사람의 일생보다 오래 남겨져 있기도 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 건물을 보면서 자기 옛날 모습이나 관련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거에요. 청실아파트는 제게 있어서, 2002년과 2004년 사이 제 모습을 담고 있는 물리적인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집에서 살았던 것 말고, 처음 전학 온 학교에서 잔뜩 주눅들어서 지냈던 기억,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 교복을 입었을 때 기억,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던 기억, 학원에서 고생하며 영단어를 외웠던 기억, 2002년 6월에 모두가 빨간 셔츠를 입고 있었던 기억, 그런 기억들도 다 청실아파트에다가 담아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없네요.
지금은 2016년이고(세월 진짜 빠르더라고요. 전 아직도 2015년 같은데.) 이젠 청실아파트 자리에는 래미안 아파트들이 새로 세워졌습니다. 청실보다 훨씬 디자인도 근사하고, 층수도 높고, 편의시설도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아파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20년은 너끈하게 계속 대치동에 서 있을 거에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 남서울상가나 청실상가도 허물어질 테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상가건물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추세로 미루어보건대 오피스텔도 딸린 상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옛날 10대 초반의 제 모습을 떠올릴 수단은 오로지 내 기억뿐이겠구나.> 이런 슬픈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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